폰지사기(Ponzi scheme)는 투자자에게 높은 수익을 약속하고 그 수익을 실제 투자 수익이 아닌 신규 투자자가 출자한 자본으로 지급하는 사기성 투자 수법이다. 점점 더 많은 신규 투자자가 참여함에 따라 운영자는 초기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불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해야 하므로 새로운 자금의 유입이 더 이상 수익의 유출을 따라갈 수 없을 때 불가피한 파산으로 이어진다.

 


Charles Ponzi(미국, 1920년대) 의 최초의 Ponzi 사기는 1920년대 미국에서 Charles Ponzi에 의해 조직되었다.

Charles Ponzi는 1920년대 초에 조직한 "폰지 사기"로 알려진 금융 사기로 유명해진 악명 높은 사기꾼이었다. 폰지는 1882년 3월 3일 이탈리아 루고에서 태어나 190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Ponzi는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며 설득력이 있어 투자자의 신뢰를 얻고 자신의 계획에 돈을 투자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 자신의 매력과 재치를 사용하는 등 자기 홍보와 홍보의 달인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미국에서 Charles Ponzi의 사기 행위는 그가 "폰지 사기"라고 부르는 금융 사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본질적으로 이 제도는 국제 우편회신 쿠폰(IRC)의 가치 차이를 이용하여 투자자에게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는데, IRC는 다른 나라에서 우표로 교환할 수 있는 일종의 상품권이었다.

Ponzi는 환율 차이로 인해 유럽에서 IRC를 사서 미국에서 팔면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고, 투자자들에게 단 90일 만에 50%의 투자 수익 또는 45일 만에 100%의 수익을 약속했다.


처음에 Ponzi는 나중에 투자한 투자자의 돈을 사용하여 초기 투자자에게 이러한 높은 수익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돈의 일부를 저택과 여러 대의 자동차를 사는 것을 포함하여 사치스러운 소비에 사용했다. 이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Ponzi는 단 몇 달 만에 투자자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수익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Ponzi는 약속한 수익금 지불을 지킬수 없었고 계획은 무너졌다. 결국 투자자들은 수백만 달러를 잃었고 Ponzi는 여러 건의 메일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Ponzi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계획"의 고전적인 예로서 수익은 나중에 투자한 투자자의 돈을 사용하여 초기 투자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Ponzi는 IRC를 자신의 투자에 대한 구실로 사용하여 자신의 계획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 었으며, 규제를 하는 감독기관이 사기를 적발하기 더 어렵게 만들었다.


Ponzi는 또한 도박꾼이자 위험 감수자였으며 종종 위험한 사업 벤처에 투자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 그는 수표 위조, 밀수, 절도 등 다양한 범죄로 여러 번 체포되었다.
그의 범죄 활동에도 불구하고 Ponzi는 자금을 사용함으로써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의 재정적 통찰력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고 그는 사기꾼으로 드러났고 투옥되어 결국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전반적으로 Ponzi는 자신의 매력, 재치 및 위험 감수 정신을 사용하여 수많은 투자자를 속이고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기꾼 중 한 명이 된 복잡하고 다면적인 사람이었다.

Bernard Madoff는 투자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사취한 대규모 폰지 사기극을 벌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 금융인이자 투자 고문이었다. 그는 1938년 4월 29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매도프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금융업계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1960년에 자신의 투자 회사인 버나드 L. 매도프 투자 증권을 설립하였고, 뉴욕에서 금융계의 저명한 일원이었다.

 

메도프 사건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배우 케빈 베이컨, 전설적 투수 샌디 쿠팩스 등 유명 인사들이 피해자 명단에 대거 포함돼 파장을 일으켰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은 “우리는 메이도프를 신으로 여겼고,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다”고 했다. 

매도프는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했으며 다양한 자선 단체에 주요 기부자였다. 그는 몇몇 비영리 단체의 이사회에서 일했고 지역 사회의 기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공적인 인물의 이면에, 마도프는 역사상 가장 큰 폰지 사기극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관된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복잡한 거래 전략을 사용하여 투자자들에게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다.


Madoff는 우량주에 투자하여 매년 10~12%의 일관된 수익을 약속하면서 20년 이상 자신의 계획을 운영했다. 실제로 Madoff는 자금을 투자하지 않고 고전적인 폰지 사기 방식인 초기 투자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메이도프와 가족은 고급 저택과 요트, 전용기 등을 사들여 호화 생활을 누렸다.

 

이 계획은 결국 2008년에 무너졌고, 투자자들에게 사상 최대 규모로 추산되는 65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초래했다. Madoff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수차례에 걸쳐 그의 행적을 조사했지만 문제점을 적발하지 못한 대목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사기가 발각된 후, 매도프는 그의 범죄로 15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거의 반성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버나드 매도프는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금융계에서 그의 명성과 지위를 이용하여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사기 중 하나를 저지를 수 있었다.

메도프는 코로나19가 확산하자 만성질환을 이유로 법원에 석방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역사상 가장 지독한 금융범죄를 저질러 아직도 피해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며 기각했다.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견디다 못한 메이도프의 장남은 201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차남은 2014년 병으로 사망했다.

 

버나드 매도프가 미국 금융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고 광범위했다. 2008년에 밝혀진 매도프의 대규모 폰지 사기는 금융 산업과 투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 투자자들의 손실: 매도프의 계획은 수천 명의 투자자들을 사취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평생 저축을 잃었다. 이 계획으로 인한 총 손실은 5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사기 중 하나이다.
2. 신뢰의 침식: 매도프의 사기는 금융 산업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대규모 사기가 장기간 발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규제 감독의 실효성과 금융산업 전반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3. 정밀 조사 강화: 매도프 스캔들의 여파로, 규제 당국과 대중에 의한 금융 산업에 대한 정밀 조사가 증가했다.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사기를 조기에 적발하지 못해 비판에 직면했고, 앞으로 유사한 제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규정이 도입됐다.
4. 평판 손상: 매도프 스캔들은 많은 금융 기관과 개인의 명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몇몇 주요 은행들과 헤지펀드들이 이 계획에 연루되었고, 유명인사들과 자선단체들을 포함한 많은 유명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다.

 

전반적으로 버나드 매도프가 미국 금융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 사기는 규제와 감독 시스템의 약점을 드러냈고,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켰고, 금융 산업에 대한 정밀 조사와 규제를 증가시켰다.


텔렉스 프리(TelexFree, 브라질, 2010년대)는 2010년대 브라질 및 기타 국가에서 운영된 Ponzi 사기로, VOIP 서비스에 투자하면 서비스에 대한 온라인 광고를 게시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VoIP 서비스 자체보다 신규 투자자로부터 대부분의 수익이 발생했다. 이 계획은 2014년에 무너져 회사 설립자들이 체포되었다.

 

텔렉스 프리 사기 사건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활동한 대규모 피라미드 사기 사건으로 제임스 메릴과 카를로스 완젤러가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국제 전화를 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홍보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다.

이 계획의 기본 구조는 새로운 투자자들을 모집하여 텔렉스 프리 플랫폼을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패키지를 구매하는 것을 포함한다. 투자자들은 대규모 투자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보너스뿐만 아니라 신규 회원을 모집할 때마다 상당한 수수료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약속된 수익은 지속 불가능했고 결국 그 계획은 무너졌다.


텔렉스 프리 제도는 고전적인 피라미드 제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기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사용하여 수익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의 발기인들은 이를 합법적인 다단계 마케팅(MLM) 사업으로 위장하려 했고, 이는 규제 기관들이 사기를 발견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 계획은 소셜 미디어와 다른 채널을 통해 홍보된 브라질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것은 또한 미국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전성기에 텔레렉스 프리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 이상의 투자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3년 브라질 당국은 이 계획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회사의 자산을 동결했다. 메릴과 완젤러는 또한 사기와 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다. 완젤러는 미국으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체포되었고, 메릴은 브라질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전체적으로 텔렉스 프리 계획은 30억 달러 이상의 투자자들을 사취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피라미드 계획 중 하나이다. 이 사례는 MLM 사업의 위험성과 금융 사기를 탐지하고 예방하는 데 있어 규제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MMM(러시아, 1990년대) MMM은 1990년대 러시아에서 활동한 폰지사기 수법으로 투자자들에게 다양한 사업에 투자해 연 1000%의 수익률을 약속했다. 이 회사의 설립자인 Sergei Mavrodi는 이 계획이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이 계획은 결국 1994년에 무너져 광범위한 항의와 투자자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세르게이 마브로디는 러시아의 사업가로, MMM 계획으로 알려진 대규모 금융 사기에 연루되어 악명을 떨쳤다. 이 제도는 1990년대에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에서 운영되었고 복잡한 거래 제도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다.

MMM 계획은 고전적인 피라미드 계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사용하여 이전 투자자들에게 수익이 지급되었다. 마브로디는 광고판, 텔레비전 광고, 그리고 다른 광고들을 포함하여, 이 계획을 홍보하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규제 감독과 비판으로부터 그 계획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인맥을 이용했다.

그 절정기에, MMM 계획은 수백만 명의 투자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사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94년 투자자들이 자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서 이 계획은 무너졌고, 회사는 의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MMM 계획의 붕괴는 러시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쳐 광범위한 재정적 손실과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마브로디는 결국 사기 및 기타 금융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마브로디는 MMM-2011과 MMM-2012 계획을 포함한 유사한 계획을 계속해서 홍보했다. 이 제도들은 분산된 교환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고안되었고 대체 통화의 형태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MMM-2011과 MMM-2012 계획도 붕괴되어 투자자들에게 추가적인 손실을 야기했다. 마브로디는 2018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금융 사기꾼 중 한 명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유산을 남겼다.


원코인 (OneCoin, 불가리아, 2010년대) 은 2010년대 불가리아와 기타 국가에서 운영된 폰지 사기로 비트코인과 경쟁할 수 있는 암호화폐라고 주장했다. 그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을 약속했고 그들이 투자할 다른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독려했지만, OneCoin이 실제 블록체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거나 합법적인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원코인 사기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운영된 대규모 폰지 사기로, 투자자들에게 원코인이라는 암호화폐를 통해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다. 불가리아 국적의 루자 이그나토바가 비트코인의 합법적인 대안으로 시장에 내놓은 계획이다.

원코인 제도의 기본 구조는 투자자들에게 패키지를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원코인 암호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토큰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자자들은 그 계획에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는 것에 대한 보너스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자에 대한 상당한 수익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원코인 암호화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투자자들은 단순히 사기성 투자 계획을 사들이고 있었다. 원코인은 합법적인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된 적이 없고 실질적인 가치도 없었다.

이 계획의 발기인들은 원코인을 홍보하기 위해 대규모 이벤트를 개최하고 유명 인사들을 대변인으로 영입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은 또한 투자자들을 그들만의 계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비트코인과 같은 합법적인 암호화폐에 대한 신용을 떨어뜨리려 했다.


원코인은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규제 당국에 의해 사기 수법으로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계속 운영되었다. 이 계획은 40억 달러 이상의 투자자들을 사취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폰지 계획 중 하나이다.


2017년, 루자 이그나토바는 사라졌고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동생 콘스탄틴 이그나토프는 2019년 미국에서 체포돼 돈세탁과 사기 혐의로 유죄를 인정했다.

원코인 제도는 암호화폐 투자와 관련된 위험과 금융사기를 탐지하고 예방하는 데 있어 규제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계획은 또한 사기 행위자들이 신기술을 사용하여 낡은 사기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과 투자자들이 새로운 시장과 신흥 시장에 투자할 때 신중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알바니아의 폰지 사기사건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알바니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금융 사기 사건이다. 이 계획은 사업가이자 전직 정부 관료인 Hajdin Sejdia에 의해 조직되었고, 복잡한 거래 계획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높은 투자 수익을 약속했다.


이 계획의 기본 구조는 세지디아가 새로운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그들의 돈을 이전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지불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포함했다. 세지디아는 화폐 투기와 금 및 기타 상품에 대한 투자를 포함한 다양한 수익성 있는 무역 활동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세지디아는 알바니아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 계획을 홍보하고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월 최대 70%의 수익률을 약속하며 투자자들의 거액 투자를 유도하는 고압적인 매도 전술도 구사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속 불가능했고, 세지디아는 결국 그들의 자금을 인출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계획은 1997년에 붕괴되어 알바니아에 광범위한 재정적 손실과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알바니아의 폰지 사기는 12억 달러 이상의 투자자들을 사취하여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사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계획의 붕괴는 알바니아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불안의 시기로 이어졌다.

세지디아는 결국 사기 및 기타 금융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계획은 규제되지 않은 시장에 투자하는 것의 위험과 금융 사기를 탐지하고 예방하는 데 있어 규제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남 마산하프플라자 사기 사건은 200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금융 사기 사건이다. 이 계획은 경남 마산시(현재 창원시)에 본사를 둔 건설회사인 경남무역회사의 임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계획의 기본 구조는 경영진들이 다수의 조개 회사를 만들고 그것들을 토지와 다른 자산들을 부풀린 가격에 매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런 다음 회사들은 그 자산을 훨씬 더 높은 가격에 경남 무역에 되팔아서 관련된 임원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이 계획은 지방 공무원들과 금융 감독 기관들의 공모로 인해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뇌물을 받거나 다른 방법으로 사기를 외면하도록 장려받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2003년에 무너졌고, 이 지역에 큰 재정 위기로 이어졌다. 수천 명의 투자자들이 관련된 경영진들이 약속한 높은 수익을 거두기를 바라며 하프 플라자 계획에 돈을 쏟아부었다. 이 계획이 실패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저축을 잃었고, 시위와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다.

하프 플라자 사기 사건은 한국의 금융 사기와 부패의 위험성을 강조했고, 한국의 기업 지배와 금융 관행에 대한 조사를 증가시켰다. 이 계획에 연루된 몇몇 임원들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 스캔들은 한국의 규제 감독과 기업 지배 관행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거성 모바일 사기 사건은 2010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주요 금융 사기 사건이다. 이 계획은 한국의 휴대전화 유통업체인 거성 회사의 경영진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계획의 기본 구조는 경영진들이 다수의 셸 회사를 만들어 그것들을 이용하여 부풀린 가격으로 휴대전화 단말기를 구입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나서 그 회사들은 그 단말기들을 훨씬 더 높은 가격에 거성에 되팔아서 관련된 임원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이 계획은 거성 직원들의 공모로 인해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는데, 거성 직원들은 뇌물을 받거나 다른 방법으로 사기를 외면했다. 이 계획에 연루된 임원들은 회사의 회계 관행을 조작하여 감독 당국과 감사들로부터 사기를 숨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2010년에 밝혀졌고, 한국에서 큰 금융 스캔들로 이어졌다. 사기의 폭로로 거성의 주가는 크게 하락하였고, 국내에서는 기업의 부패와 사기에 대한 국민적인 항의가 이어졌다.

이 계획에 연루된 임원들은 체포되어 여러 가지 사기 및 기타 금융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스캔들은 또한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와 금융 관행에 대한 조사를 증가시켰고, 한국 경제계에 더 큰 투명성과 책임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돼지사육업체 ‘도나도나’ 사건의 최덕수 대표는 2009년∼2013년 어미 돼지 1마리당 500만∼600만원을 투자하면 새끼 돼지를 20마리 낳아 다달이 일정한 수익금을 주기로 했으나, 전형적인 피라미드 사기가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받은 투자금으로 앞선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등 돌려막기를 하다 투자자 1만여 명으로부터 2천400억여원을 가로챈 혐의(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로 지난 2013년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최씨의 유사수신행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업무상 횡령 등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최씨에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만여 명, 피해 규모는 2,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밝혀진 많은 폰지 사기의 몇 가지 예일 뿐이다. 폰지 사기는 시공을 초월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금융 범죄의 클래식’이다. 고수익에 고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투자의 기본 상식이다. 

폰지사기와 일반적인 금융투자의 대표적인 차이로는 "늘 변하지 않는 높은 수익률"을 들 수 있다. 하다 못해 은행도 금리가 변하는데, 시장의 흐름에 따라 수익률이 변하는 것이 당연한 금융투자에서 시류와 상관 없이 항상 고수익만을 기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폰지사기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포트폴리오의 불투명성이다. 쉽게 말해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그렇게 장담해대면서 정작 내 돈을 어떻게 굴리고 있는지는 어물어물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투자 사기의 경우 검증되지 않은 자체 제작 프로그램을 설치하라고 시키거나, 별도로 제작한 홈페이지로 접근을 유도한다. 당연히 가짜 사이트이며, 수익률 및 계좌 잔액 등은 가짜이다.

또한 투자 일임시 투자금을 투자자 본인 명의의 계좌로 입금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사기 혹은 불법이다. 투자자문의 탈을 쓴 폰지 사기라면 돌려막기나 빼돌리기를 위해서 대표의 개인계좌나 법인 명의의 계좌로 입금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내 명의의 계좌로 입금하더라도 출금이 가능한 현금카드나 공인인증서를 제공하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술집들이 식사를 덤으로 제공하는 마케팅이 유행했다. 저녁에 술을 한 잔 마시면 다음날 점심이 무료였다. 여기에 혹해 많은 애주가가 몰려들었는데, 음식 간이 꽤 짭짤해서 조금씩 먹다 보면 결국 맥주를 연거푸 시켜야 했다. 공짜인 줄 알았던 식사가 술값에 모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손님들은 영수증을 받아들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기서 탄생한 말이 “공짜 점심은 없다”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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