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폰지사기 또는 폰지게임, 폰지라고 불리는 사기수법은 이탈리아인으로 미국에 건너온 찰스 폰지(Charles Ponzi)라는 사람에 의해 유명해졌으며, 오늘날까지 이러한 형태의 사기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피해자들이 속속 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폰지사기란 투자자들에게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투자를 받고, 투자를 받은 돈으로 다른 투자자들을 모은 뒤, 이들의 투자금으로 기존의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수익을 지급하는데, 대부분의 투자자가 완전한 상환을 요구하지 않고 이자나 배당금만 받아 가기 때문에 지속해서 보유한 투자금을 늘릴 수 있으며, 이렇게 늘어난 투자금의 규모가 일정 수준이 되었을 때 도주하여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금융사기 기법이다. 실제로는 사업에 대한 투자를 통한 이윤창출보다는 돌려막기식으로 투자금을 유치하거나 빌려 투자자들에게 이자나 배당을 지급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조는 투자금유입이 안되면 무너지게 된다.

찰스 폰지

찰스폰지와 폰지사기

 

☞ 폰지사기의 원조가 되는 찰스 폰지(1882~1949)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1903년 21세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1세대였다. 미국으로 오는 미국행 여객선안의 선상도박장에서 돈을 날리고 2달러 50센트로 미국에 도착한 그는 도벽과 낭비벽이 심한 사람이었다. 미국에 온 뒤에도 허황된 꿈을 쫓으며, 식당과 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밀수단에 가입하여 은행 가계수표를 훔쳐 사용하여 1910년 감옥에 투옥되었고, 감옥에서는 고향 친척들에게는 교도소장의 특별보좌역으로 채용됐다는 내용의 거짓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 감옥에서 풀려난 뒤 밀수혐의로 재수감된 폰지는 감옥에서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명은 마피아 출신 조폭, 나머지는 미국 동부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투기꾼 어거스터스 하인즈와 함께 구리 투기와 가격 조작을 통해 1907년 미국 공황을 유발한 찰스 모스였다. 사기와 폭력 전문가인 세 사람은 교도소에서 각별한 친분을 쌓았는데, 꾀병으로 병보석을 얻어 출감한 찰스 모스를 보고 폰지는 굴리는 돈이 크면 클수록, 사기사건의 금액이 많을수록 처벌받지 않는다는 교훈을 배웠다고 한다.  

 

 감옥에서 다시 풀려나온 폰지는 이런 저런 사업을 벌였으나 모두 망하고 1919년 광고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스페인으로부터 편지봉투안에 국제반신우표권(IRC)이 들어있는 광고 카탈로그 주문 편지를 받았다. 이 우표권을 처음 본 폰지는 국제반신우표권을 살펴보던 중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우표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 환율로 거래되어 국제반신우표권이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1달러, 미국 보스턴에서는 3.3달러로 우표교환가가 설정되어 차액거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국제반신우표권은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된 나라에서는 모두 우표로 교환이 가능해 싼 국가에서 우표를 사서 비싼 국가에서 우표를 팔면 이익이 남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Arbitrage)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기를 팔며 호황을 구가한 미국이 인플레이션과 달러화 강세로 미국의 우표가격은 올랐지만, 통화가치가 크게 떨어진 이탈리아에서는 우표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였다. 이탈리아의 국제반신우표권을 싸게 산 다음 미국에서 우표로 바꿔 제값에 팔면 위험 부담 없이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실제로 수익률이 무려 400%나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1달러에 산 국제반신우표권을 미국 보스턴에 가져와서 우표로 바꾸고, 이를 미국에서 팔면 3.3달러가 되는 것이어서 일견 상당한 수익이 보장되는 이 사업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차익거래를 하기 위해 폰지는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했으나 대출이 거부되어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지인들로부터 투자금을 받아낸다. 그리고 본격적인 사기를 위해 1920년 1월증권거래회사를 세웠고, 처음 한 달 동안 18명이 1,800 달러를 투자했다. 이후 폰지는 45일후 원금의 50%, 90일후 원금의 100%의 수익을 지급하겠다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하였고,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람들도 한 두명이 실제로 두배의 수익금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자 1920년 2월 5000달러에 그쳤던 모집액이 4개월만에 6월에는 4억5000만달러로 불어났는데,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300억달러, 약 36조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미국 전역에 퍼져 더 많은 투자자들이 모여들어 투자 총액이 막대한 규모로 불어났으며, 폰지는 몇 개월 만에 무일푼에서 갑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막대한 규모의 투자금이 모였지만, 90일 내에 투자금의 두 배를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단 국제반신우표권의 대량 매매는 허용되지 않았고, 우표를 대량으로 팔기도 어려웠으며, 나중에 투자한 사람들의 투자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수익금을 배분하는 금융피라미드구조로 이른바 돌려막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보스턴 우체국에서는 폰지가 생각하는 대량 유통 매매방식의 사업을 허용한 전례가 없어 대량 매매가 어려웠으며, 국제반신우표권을 우표로 바꾸고 매각하여 환전하는 시간이 폰지가 투자자들에게 약정한 기일보다 오래 걸린다는 걸 알게된 일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된 사업과 수익도 없이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면서 폰지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단기간에 큰 수익을 낸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폰지를 고소하기도 하였으나 심지어 폰지는 승소하였으며, 메사추세츠주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조사관들을 회유해서 무마시키기도 하였다.

 

 돌려막기 사기가 지급불능사태가 오기 전에 한 투자자가 보스턴포스트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1920년 8월2일 이 신문사는 폰지가 설명한 국제반신우표권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고 대서특필하자,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폰지는 지급불능상태가 되어 파산신고를 하였고 구속되었는데, 최종 집계된 피해자의 수는 무려 1만7000여명, 피해액은 10억 달러, 약 1조100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 폭로로 보스턴포스트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폰지사기로 인해 하노버트러스트 은행을 비롯한 많은 은행이 도산하였고, 투자자들은 1달러당 30센트 수준의 금액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폰지는 금융피라미드의 원조로 언급되며, 폰지사기는 다단계 금융사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게 되었다.


 이후 폰지는 교도소에서 보석으로 다시 풀려난 후, 1925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부동산 거품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유령회사를 만들어 놓고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폰지는 교도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도주하였고 부동산 투기가 한창이던 플로리다로 숨어들어 부동산 피라미드 사기를 쳤고, 플로리다에서 꼬리가 잡히자 텍사스에서 변장한 채 부동산 사기를 치다가 체포되었는데, 체포되었을 때는 정부와 흥정을 벌였다고 한다. 자신이 해외로 유출시킨 돈을 미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며 자신의 형량을 협상한 폰지는 1934년 영구 추방 조건으로 풀려났으며,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브라질을 전전하다 1948년 빈곤 속에서 사망할 때까지 크고 작은 사기행각을 끝없이 펼쳤다고 한다.

 

 

 폰지가 국제반신우표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소설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가 1844년에 쓴 마틴 처즐위트의 삶과 도전과 1857년에 쓴 리틀 도릿 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리틀 도릿 은 영국 BBC에서 드라마로 제작할 정도로 유명한 소설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찰스디킨스의 어린 시절의 삶을 그였다고 한다. 찰스디킨스가 살던 시절 영국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30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감옥을 국가에서 운영하지 않고, 민간기업에 운영권을 팔아 채권추심기관 같은 곳에서 감옥을 운영하며 채무를 받아할 때까지 감옥살이를 시켰다고 한다. 

찰스디킨즈 원작 리틀 도릿

 찰스디킨스가 자신의 어린시절 참담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리틀 도릿에 빚쟁이 감옥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에이미 도릿은 빚쟁이 감옥에 있는 자존심 강한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돌보는데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간 이유가 바로 다단계 사기 때문이었다. 고배당의 유혹으로 투자자들을 모은뒤 신규 투자자의 자금으로 돌려막기를 하던 은행이 파산하자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단지 빚 때문에 사람을 감옥에 넣는다는 참담한 현실이 이 소설을 통해 알려지며 영국에서는 결국 빚쟁이 감옥을 없앴다고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다단계 금융피라미드 사기방식을 보고 폰지는 돈 벌 궁리를 했다고 한다.

 

매도프사건


  폰지사기의 범주에 속하는 유명한 사건으로는 매도프사건이 유명하다. 2008년 12월 미국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을 지낸 펀드매니저인 버나드 매도프(Bernard Madoff)가 금융사기로 미국연방수사국 FBI에 체포되어 폰지사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매도프는 1960년 자신의 이름을 딴 버나드매도프LLC 라는 증권사를 설립한 뒤 약20년 동안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최대 65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사기 행각을 벌였다. 매도프는 고수익보장을 조건으로 미국, 유럽  중동, 아시아 등의 개인 투자자로부터 신규 투자금을 유치해 그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의 수익금을 지급했는데, 애널리스트 해리 마코폴로스가 1999년 이 사건에 대해 사기 의혹을 제기하고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보했으나 무시당했고, 2005년과 2007년에도 증거를 제출했으나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매도프는 매년 8~10%를 수익금으로 투자자에게 지급하였는데, 투자받은 돈은 실제 투자는 하지 않고 기존 투자자에게 돌려막기 자금으로 지급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투자한 투자자들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부유한 자선단체재단이나 저명인사들이어서 원금반환에 요구도 없어서 오랜동안 유지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전형적인 다단계 방식의 사기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액은 650억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유명인과 재단, 거대 은행 등이 모두 피해를 보았으며, 2008년 체포된 메도프는 15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복역중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자살하였고, 매도프의 장남도 사람들의 비난을 못이겨 자살하였으며, 차남은 암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알바니아 금융사기사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던 알바니아가 1991년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변환후, 자본주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1992년 심장 전문의 출신인 살리 베리샤가 정권을 잡으면서 초빙한 외부 경제전문가 하이딘 세이디야가 정부의 지원하에 23개의 피라미드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들 피라미드 회사들은 주로 무기 밀매와 고객들의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고 일단 고객들에게 약속한 고수익률의 배당금을 지급해주었다. 이 회사들은 알바니아 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승인된 회사들이었고 정부 관료들과의 유착관계도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1997년초까지 알바니아 국민의 약60% 인 200만명(당시 알바니아 총인구 330만명)이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들 피라미드 회사들이 불법 무기 밀매와 투자 유치만으로 정상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없었고 결국 5년 만인 1997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이 피라미드 회사들은 연쇄 도산을 하고 폰지사기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알바니아의 경우는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관련되고 이들 절대 다수가 전재산을 잃어버렸으며, 국가 주요 기업들도 투자하여 막대한 손실을 본 상황에서 국가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 버렸다. 처음 시위형태이던 것이 폭동형태가 되었고, 총탄 약 15억 발, 수류탄 350만 정, 지뢰 100만 정, 총기 65만 정이 폭도들에 의해 탈취되어 무정부상태가 되어 버리자, 인근 주변국가의 군대들이 개입하여 사태를 수습하였고, 살리 베리샤는 실각하였다.

 

 

 

하프플라자 사건

  2002년 8월 19일, 토비즈그룹(대표 유혁수)은 하프플라자라는 쇼핑몰을 오픈했는데, 오픈 초기부터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전략으로 구매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즉, 모든 물품을 반값에 판매하고, 재고 부족으로 판매가 불가할 경우 1.5배의 금액을 환불한다는 마케팅정책을 홍보하였다. 당연히 구매자들이 넘쳐나고 오픈 4개월인 2002년 12월에는 하루 방문자수 20만명을 기록하며 인터넷 쇼핑몰 랭킹 8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2003년 2월 4일, 소비자보호원은 하프플라자에 대해 소비자 경보를 발령했는데, 이미 2002년 11월부터 결제 후 제품이 배송되지 않고, 취소를 해도 환불이 되지 않는 등의 소비자 피해고발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2013년 2월 13일 허위광고 혐의로 하프플라자에 과징금 5천만원을 부과했으며, 검찰에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유혁수는 도주하였고, 토비즈그룹의 이사 2명과 함께 유혁수는 2월 21일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만 15만명이었고, 피해액은 무려 300억원에 달했다. 일부 소비자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44억원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지만 보상금 수령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사건은 소비자가 물건을 구입한 후 따로 승인해야 쇼핑목에 대금이 전달되는 에스크로시스템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대중화된 시스템이지만 2003년만 하더라도 국내에선 볼 수 없던 시스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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