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출신으로 1888년 10월 7일출생하여 1966년 8월 2일 사망하였다. 

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고급 참모과정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한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였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는데, 소좌시절에는 캄차카 반도에 잠입, 홀로 종단하여 스파이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참모본부에서 일하다 1936년 중국 베이징에 주둔중인 제1연대의 연대장을 맡았는데, 그가 맡고 있는 연대가 중국군의 사격으로 긴급 점호를 하였는데, 1명의 부하사병이 급똥으로 점호에 불참하자 자초지종을 파악하지도 않고, 실종처리하여 중국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이것이 중일전쟁을 촉발한 노구교 사건이다. 

 

 이 사건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4군의 참모장을 맡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유년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1940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제18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하였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후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바탄 반도전에 투입되었다.

☞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투입되었는데, 대본영에서는 인도진공을 계획하였으나, 밀림과 산악지역에서는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무타구치의 반대로 작전은 연기되었다.

1943년 3월 버마 방위를 담당하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는데, 영국군이 인도로부터 월경하여 버마의 일본군을 공격하자, 무타구치는 생각을 바꿔서 이전에 반대했던 인도진공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보급이나 병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세워 휘하 부대장들이 모두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였고, 1944년 3월, 그 휘하에 있던 제15군(15, 31, 33사단으로 구성됨)은 빈약한 준비와 병참으로 인도공략을 위해 진격했으나, 8만 5천여 명의 병력중 5만 명이 대부분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대참패로 끝났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팔 전투이다.

 

☞ 임팔전투의 패전이후 일본으로 돌아왔고, 1944년 12월 예편하였으며, 1945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사관학교 예과의 교장이 되었으나, 일본이 항복하여 단명에 그쳤다. 그는 잔혹행위에 대한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으나 불기소 처분 후 재판을 위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고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48년 3월에 만기 석방되었다.

 

 전쟁이 끝난후에도 그는 부하들의 무능때문에 임팔 작전이 실패했다는 변명으로 자기의 책임을 전가하였으며,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무타구치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더불어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삼대오물(三大汚物)이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 그의 무능력함은 여명의 눈동자가 버마에서의 전투실상 등을 다루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위키 등에서는 임팔 작전의 큰 실패로 인하여 사실 그는 독립군의 숨은 장군이었고, 대한민국 독립의 일등공신이다으로 희화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임팔전투의 실패를 부하탓으로 변명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임팔전투의 폐배가 부하탓이라는 내용의 전단지가 배포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노구교 사건과 임팔전투로 인하여 일본의 중일전쟁을 시작하고, 그 전쟁이 확전된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인도공격 실패후 몰락을 촉발한 임팔전투 패배의 주인공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본의 지휘관이었다. 

 

  노구교 사건당시 중국군의 습격이라고 생각한 연대장 무다구치는 비상을 걸고 중국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는데 사실 문제의 실종자는 용변을 보느라 점호에 불참한건데, 어차피 중국과 전쟁을 할 수 있는 핑계를 만들고자 했던 일본 군부에게는 호재로 작용했으며, 만주사변당시 고의성짙은 기차폭발사건과 같은 맥락이었다. 

 

 

  임팔전투당시 영국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부분은 그렇다치더라도 늪과 같은 우기의 임팔지역을 항공보급없이 몽고의 징기츠칸을 언급하며 소와 말로 돌파하고, 돌파후 소와 말을 식량으로 자급자족하려했던 무모함으로 보급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이겨 적의 것을 빼앗아 보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보급 20년 경력의 부하장교의 반대를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며, 사방에 보이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하였으며, 일본 본토의 대본영에서 육군대학교 동문인 도조히데키 육군장관 겸 참모총장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임팔전투에 대한 승인이 나게 되는데, 이 때 그의 유명한 장담, "군에 몸을 담은지 어언 30년, 이번만큼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라고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서 그의 무능함은 오히려 연합군측에서는 그를 전범이 아닌 아군으로 바라보게 하였고, 그의 무능으로 인하여 목숨을 살리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데, 엘리트 군인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었던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하들에게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는 치졸함을 보여주게 되고, 심지어는 장례식장에서도 변명을 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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