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남 아파트 개발
▣ 1962년 정부주도로 대한주택공사(“주공”)가 설립되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과 신도시, 신시가지 건설을 주도했으며, 주공에 이어 많은 건설회사들이 아파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부터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마포 아파트 단지부터 정릉·홍제동·문화촌 등에 소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한남동의 힐탑 아파트, 화곡동 아파트, 이태원의 탑라인 아파트 등 대형 고층아파트가 세워졌다.
- 1970년 중·상류층을 위한 큰 평형의 한강맨션이 건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났는데, 한강맨션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식 중온수공급보일러를 설치하여 아파트 주거의 편리함을 증진시켰으며, 이후 지어진 아파트 대부분이 중앙난방을 채택하였다
▣ 강남이 1963년 서울에 편입되고(당시 강남지역 인구는 3만명정도) 1969년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건설되면서 강남개발이 본격화되어 1971년 9월 남서울아파트(현재 반포주공1단지)가 분양하였다.
- 반포주공아파트(남서울아파트)는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건설한 최초의 주공아파트 대단지로 강남 아파트 개발의 시작이었다.
- 22평~62평 3786가구로 지은 대단지로 국내 최초의 복층 설계를 도입하여 6층이나 1,3,5층만 현관을 설치하였고 나머지 2,4,6층은 실내에 설치한 계단을 통하여 올라갈 수 있었다
- 온수공급과 지역난방시설(연탄보일러사용)을 최초 설치한 아파트로 1단지에 이어 2단지와 3단지까지 건축하여 분양하였으며, 당시 1단지 분양가는 22평 420만원, 32평 600만원, 42평 780만원 이었다.
▣ 반포주공을 필두로 반포·여의도·잠실 등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도시에 학교와 시장, 어린이놀이터, 조경지역, 주차장 등 사회적 편익시설을 갖춘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형성되었고 당시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강남개발에 따라 조성된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에는 사회 지도층들이 대거 이주함으로써 아파트 단지는 부촌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 이에 따라 1963년 강남이 서울시에 편입되고, 1975년 강동, 강서, 강북 권역이 서울시에 편입되는 등 서울권역이 확대되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 구조로 재편.
▣ 1970년대 여의도개발시기에 영동지구 개발도 시작되는데 계획대로 개발이 지연되자 70년대 중후반 사대문안의 명문학교를 강제로 이주(경기고, 서울고, 휘문고, 경기여고 등)시켜 강남 8학군 시대를 열었고, 이에 따라 강남 아파트 값도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 1970년대 중후반 초기 강남아파트붐을 이끌었던 테헤란로 북쪽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테헤란로 남쪽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첫 입주민의 계층부터 상이했다.
- 1976년 입주를 시작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상류층을 겨냥한 40~60평형대 아파트가 다수였으며, 입주층은 사업가, 고위 관료, 국회의원 등 상류층이었고, 반면 1979년 입주를 시작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무주택 서민을 위한 30평형대가 대부분이었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탄생은 제3한강교라는 기반시설과 더불어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1975년에 강남구가 탄생하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되자,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 1973년 5만30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21만6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75년 4월, 제1차 사업이 시작되어 1~3차 사업까지는 현대건설이 조성을 맡았고 4~14차는 현대산업개발이 사업을 주도하였다.
- 1977년 당시 50평대 분양가는 평당 55만원으로, 2,750만원정도였다.(당시 미분양)
- 1,2차 단지는 교통이 불편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한데다 홍보도 잘되지 않아 별로 인기가 없었으나, ‘현대건설’이라는 브랜드와 강남 아파트 열기를 타고 압구정으로 중산층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7차 단지까지 입주가 끝난 압구정 현대는 이미 ‘명품’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87년 4월 14차까지 총 6,148가구의 대단지로 조성되었으며, 주택공사가 건립했던 잠실이나 반포와 달리 중대형 면적이 많아 명실공히 중ㆍ상류층을 위한 대단지 고급 아파트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민간이 건립한 최대 고급 단지라는 것 외에 건축 기술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현대건설은 15층의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새로운 설계와 구조, 시공기술을 모두 동원했고 이런 공법들은 다른 건설사들이 모방해 한동안 아파트 건축 기술의 모델이 되었다.
- 현대건설측에서는 아파트 시공에서 (그 때까지)국내 보편적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라멘 구조에서 탈피해 무량판(FLAT-SLAB)과 조립식(PRE-FAB) 구조 등 선진공법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인원 감축 작업의 표준화를 기하고 과학적 공정관리를 통해 낭비 요소를 제거했다고 밝히고 있다.
▣ 대치동 은마아파트 : 31평 2,674가구, 34평 1,750가구 등 4,424가구(14층 28개동, 1979.9.3준공)
- 1980년에 분양한 은마2차아파트는 평당 68만원으로 31평형은 1,847만원, 34평은 2,094만원에 분양하였으며, 융자금 250만원을 별도로 상환하였다.
- 2000년대 과외금지와 강북 명문고의 강남이전으로 인한 대치동 학원가 특수현상으로 시세가 급등하여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로 급성장하였다.
- 당시 강남 Big 4 아파트(압구정 현대, 잠실 주공, 개포 주공, 대치 은마)중 하나로 원래 은마아파트 부지자체는 비만 오면 물이 고였던 저습지라 버려진 땅이었지만 한보주택이 부지를 헐값에 사들이면서 적절하게 로비를 통해 주거용지로 변경하였고, 도로도 세종로 다음으로 넓은 영동대로와 남부순환로를 70년대 깔았으나, 초기 3년동안은 도로외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 아파트건설후 부동산 규제로 분양이 잘 안되어 한보는 자금난으로 도산직전까지 갔으나, 2차 오일쇼크로 부동산이 안전자산으로 다시 각광받은 덕택에 불과 20일만에 분양이 완료되어 한보는 현찰로 2000억원을 손에 쥐며 대기업 반열로 도약하게 되었다.
- 당시 기준으로 아파트 내부에 수도, 110V전기, 연탄이 아닌 열병합보일러 난방, 엘리베이터 등을 설치하여 아파트의 현대화를 선도하였다.
(2) 여의도 아파트 개발
▣ 여의도동의 공식 넓이는 8.48㎢(한강수역+밤섬의 일부를 더한 것)이나, 실제 한강둔치안쪽 순수 택지를 기준으로는 2.9㎢이다.
▣ 일제때 여의도비행장이 있어 경성항공사가 이용했고, 광복후에는 KNA항공사가 한때 이용했으며 1953년부터는 국제공항으로 사용되었다가 여름철 장마때 침수로 사용이 불가능해지자 1958년에 김포공항으로 국제공항을 이전하였다.
▣ 서울시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신시가지 개발을 목적으로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웠고, 1970년 2월 10일 밤섬 폭파로부터 불과 110일만에 여의도 윤중제(현 여의방죽)가 준공하였다.
▣ 1971년 착공하여 1년만에 준공한 시범아파트는 24개동 1,584세대로 건설되었으며, 소형인 25평이 212만원, 40평대가 571만원에 분양하여 입주두달만에 40평형대가 1,000만원에 도달하였다.
- 초기에 입주자가 없어 공무원 등에게 반강제 입주하게 하기도 했으나, 1974년 삼익주택, 한양건설을 비롯한 민간 건설사업자들도 진출,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민간 고층 아파트 단지가 생겼으며 당시 획기적인 고층 고속 엘리베이터, 중앙집중식난방 등이 설치되었고, 여의도를 특별 학군으로 분류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소득 높은 고학력층들이 많이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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