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와 교토 인근에는 동쪽으로 나라시가 있고, 서쪽으로는 고베시가 있어 이 4개의 도시를 돌아보는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과 금전의 제약으로 고베와 나라, 그 인근 지역을 돌아보고 오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일본 관서지방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로 교토이전 일본의 도읍지였던 유서깊은 나라시로 이동하였다.
일단 동대사나 흥복사와 가까운 긴테쓰 나라역으로 이동한 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동대사를 방문했다.
긴테쓰 나라역앞에는 한 스님의 동상이 서있고, 우연찮게 한 스님이 시주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상에 있는 스님의 정체는 누구일까? 쇼무천황이 대승정으로 있던 당시 일본최고의 고승인 이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로자나불상을조성해서 동대사에 안치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며, 이 스님은 동대사의 거대한 청동불상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고 한다. 이 분이 왕인박사의 직계후손으로 일본지도를 처음 제작하였다고 하는 백제계 행기(668-749)스님이 며, 동대사 청동불상이 완성된 749년에 열반하셨다고 한다.
오사카나 교토에 비해 35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인 나라시는 년간 1,3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도시로 교토부, 오사카부와 같은 부 소속이 아닌 나라현 소속이다. 역사적으로 현재의 나라현에 속하는 후지와라쿄에서 실질적인 나라로 불리는 헤이조쿄로 천도하는 710년부터 교토의 헤이안쿄로 천도하는 794년까지 나라시대라고 불린다.
현재의 나라지방인 헤이조쿄는 710년부터 740년까지 수도였으며, 740년 현재 오사카 중심지 난바지역인 나니와쿄로 천도하였다가 745년 다시 헤이조쿄로 천도한 뒤, 784년 현재의 교토지역인 나가오카쿄로 천도하여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할 때까지 나라가 일본의 수도로 꽃을 피웠다.
784년 교토지방에 있는 나가오카쿄로 천도한 이유중에 하나가 나라의 동대사가 지니는 권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였다니 당시 동대사가 지닌 영향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라역 근처의 성공회 교회가 있고 부설 유치원이 있어 한 장 찍어보았다.
나라역에서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흥복사와 동대사, 나라국립박물관이 있었으나, 일정이 빠듯하여 동대사외에는 포기해야만 했다.
동대사는 사슴이 많은 공원으로도 유명하고, 세계최대 규모의 목조 법당건물인 대불전과 세계 최대의 청동 비로자나불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대사는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라고 한다.
동대사 남대문(난다이몬)앞의 사슴공원은 메이지유신시절인 1880년 황폐한 사찰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여 1922년에는 일본의 명승지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사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 사슴들에게 주는 먹이인 센베를 10개 정도에 100엔 내외로 구입할 수 있는데, 먹이때문에 돌진하는 사슴의 뿔은 충분히 아프기 떄문에 조심해야 한다. 수많은 사슴들로 인해 그들의 인분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잘 보면서 돌아다녀야 한다. 사슴공원은 나라공원의 북부 일부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동대사 경내로 진입하게되면 대화엄사라고 적혀있는 거대한 목조 건물로 일본 최대의 절의 대문을 보게되는데, 이것이 일본의 국보인 동대사 남대문, 일본어로는 난다이몬이라고 한다. 이 문은 21m의 기둥을 18개나 사용하였으며, 높이는 25.46m이고 수령은 무려 800년이라고 한다. 최초 건립이후 10세기때 태풍으로 무너지고, 가마쿠라 막부시대인 1199년 복원되었다고 하며, 1층내부에는 천정이 없고, 2층까지 공간이 트여있어, 들어서서 위로 올려다보면 개방감이 든다.
일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이지유신 이전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이 쇼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인 에도시대의 도쿠가와 막부, 그 이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등이 일본을 통일하기 이전 일본의 혼란기를 전국시대라고 하며, 전국시대이전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후손이 쇼군이 되어 교토를 중심으로 지배하던 시대가 무로마치 막부시대이다. 무로마치 막부 이전의 지배자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후손들이 쇼군이었던 가마쿠라 막부로 현재의 도쿄인근의 가마쿠라를 근거지로 하였다.
동대사의 남대문은 이 가마쿠라 시대에 동대사를 부흥시킨 우겐스님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남대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사천왕상의 위엄에 기가 눌려서 들어서게 된다. 남대문(난다이몬)을 지날 때 양쪽에 있는 높이 8.4m의 박력 있는 목각상이 금강역사상이다. 오른쪽이 아교(阿形), 왼쪽이 운교(吽形)라고 하며 무게는 둘 다 6.6톤이나 된다고 하며, 악귀가 동대사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남대문을 들어서게 되면 동대사 경내와 바깥을 구분짓는 중문이 화려한 단장을 하고 맞이하고, 그 옆으로 길다란 회랑이 늘어서 있는데, 이 중문과 회랑도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근래에는 목조로 거대한 건물을 짓는 기술이 발달하여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지만, 적어도 세계 최대규모의 법당 건물임에는 틀림없는 동대사 대불전은 일본의 국보이기도 하다. 동대사의 본당인 대불전(다이부츠덴)은 1709년 재건된 현재 건물이 원래 크기의 2/3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552년 이후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불교가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일본 쇼무천황 시기에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민심이 흉흉하자 이를 불심으로 타개하기 위해 동대사를 세웠다고 한다.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대불전(다이부츠덴)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다이부츠덴과 청동대불은 한반도 도래인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도다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도다이지의 청동불상과 대불전(다이부츠덴)을 건설하는데는 260만명의 기부 혹은 조력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16m가 넘는 세계 최대규모의 청동 불상인 도다이지 청동불상을 만들기 위해서 3년 넘게 8번의 주조를 하여 만들어졌고, 거대한 크기 때문에 불상의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하여 조립하였다고 하며, 751년 불상이 완성되었고, 752년 기념식에는 무려 만명의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청동불상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청동의 양이 당시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청동양과 맞먹었고 이로 인해 당시 일본 왕실의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닥을 보면 대불전으로 향하는 길에 깔린 돌이 다른 종류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심에 검은색 돌은 인도, 바로 옆 양쪽에 붉은 색을 띄는 돌은 중국, 세번째에 있는 연한 회색의 돌이 한국, 마지막으로 양쪽의 넓은 길에 대각선으로 깔린 돌길이 일본을 상징했으며, 이 4국의 승려들은 이 길을 따라 행사에 입장했다고 한다.
과거 도다이지의 위상은 다이부츠덴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약간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다이부츠덴은 2번의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고, 현재의 다이부츠덴은 1709년에 재건된 3번째 대불전 금당이다.
현재의 대불전(다이부츠덴)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의 1/3 규모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해진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다이부츠덴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이름의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m, 측면 50.48m, 높이 48.74m로 세계 최대의 목조 법당건물이다.
3번째 대불전은 과거의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000톤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그래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다이부츠덴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많은 서양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여러 개의 나무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임으로써 지붕의 무게를 12% 감소시켰다.
대불전 앞마당 청동 등롱은 도다이지에 남은 몇 안되는 나라 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일본의 청동문화는 대단히 발달하여 동판작업의 기술이 거의 완성되었으며, 등롱의 음각 보상당초문을 보면 당시 일본의 청동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다. 도다이지의 건물과 미술품들로 볼 때 당시 일본의 목조와 청동기술이 발달한 반면 석조기술은 매우 부족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비해 목조와 청동기술이 잘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대불전옆으로 가보면, 비가 왔을 때 목조상을 보호하기 위해 빨간 우의를 입은 목조상이 있다. 일명 빨간 망토의 할머니로 불리는 목조 나한상인 빈주루 존자라고 하며,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약병이라고 한다. 자신이 아픈 부위가 있을 때 빈주루 존자의 같은 부위를 문지르면 낫는다고 한다. 그래서 무릎이 아픈 사람들이 빈주루존자의 무릎을 만져 무릎이 반질반질하다.
동대사 대불전 안에 안치된 불상이 바로 세계 최대규모의 청동불상인 대불(大佛)이다. 대부분의 절이 전각을 먼저 짓고 불상을 안치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도다이지의 경우는 대불을 먼저 주조하고 대불의 크기에 맞춰 대불전을 지었으니 대불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대불의 본 명칭은 동조로사나불좌상(銅造盧舎那佛坐像)으로 『화엄경(華厳經)』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중심에 위치하여 대우주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붙였으나 일명 도다이지 대불로 통칭된다. 대불 역시 쇼무천황시기에 의해 주조되었다. 크기가 높이 약 14.7m, 추정 중량 250톤에 이른다.
쇼무천황이 743년, "국내의 구리를 모두 다 써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거대한 금동불을 만든다"는 취지를 서술한 <대불 건립 조칙>을 내린 이후 23여년에 걸쳐 조영되었으며, 이때 동원된 인원만 매년 260만 3,53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약 550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대불 제작은 바야흐로 국민적인 대사업이었던 것이다.
어렵게 건립된 대불은 이후 두 번의 화재로 대불전과 함께 소실되어 제작 당시의 모습은 대좌, 소매, 무릎을 중심으로 한 일부분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상반신은 중세에 제작, 머리 부분은 에도시대에 재건되었다.
도다이지 대불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는 곳으로 당시 대불 도금을 위해 749년 황금 900량을 조정에 바친 이가 의자왕의 4대손인 왕경복(王敬福)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경복은 당시 무쓰노쿠니[陸奧國·현 미야기현] 태수로 동북지방을 개척하면서 일본 최초로 황금광을 채굴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불전을 비롯해 도다이지의 7당가람 조영에 고구려계 이주민인 다카쿠라노 후쿠신[高倉福信]과 신라계 이주민인 이나베노 모모요[狙名部百世]가 참가했다고 전한다.
『도다이지요록』에 의하면 당시 구리는 규슈 북동부에 위치한 가와라[香春]의 구리 광산에서 주로 조달했다고 하는데, 가와라는 당시 첨단 제철기술을 가진 신라계 이주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알려져있다.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인 양변(良辯) 승정(僧正)은 동대사의 창건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백제계 고승 대승정 행기(行基)는 대불건설의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전국을 동분서주하였다. 대불 주조의 총지휘를 맡은 사람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 백제의 왕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국골부(國骨富)의 손자인 구니나카무라지기미마로(國中連公麻呂)이며 대불건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의 대다수가 도래인이었다.
현재의 청동대불은 1691년에 완성된 것으로, 불상의 하부는 처음 만들어졌던 부분이 남아있다고 한다. 특히 불상이 올라타있는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대한 손바닥에는 성인 16명이 올라갈 정도라고 한다.
대불전 내부의 또 다른 볼거리는 구멍이 뚫린 기둥으로, 이 구멍을 통과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서 복을 받게 된다고도 하고, 죽어서 극락으로 간다고도 하고, 1년치 액땜을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통고를 시도해보는데 실제 약간 과체중의 성인 남성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참고로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탑이 있던 자리에 동으로 된 7층탑 상륜을 재현한 것으로 스리랑카에서 기증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관람객들로 인해 어수선하여 남대문, 대불전, 청동대불 등 유명 문화재 위주로 돌아보느라 아쉬웠던 동대사를 나오니 가가미이케로 불리는 작은 연못과 사슴이 동물원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나라시에는 흥복사, 뵤도인,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호류사 등 교토에 버금가는 수많은 유산들이 있음에도 일정상의 문제로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어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언제쯤 다시 이런 기회를 만들어 볼 수 있을지 기약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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